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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 | 136 | 한편 이 소란의 한가운데서 루이나 해군 인사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HX-84 사태 직후 소집된 전훈 분석 회의에서, 예비역 편입 대기 상태나 다름없던 한 제독이 작성한 보고서가 수뇌부의 책상에 올라온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세 줄이었다. 호위 없는 선단은 선단이 아니다. 호위는 함정의 수가 아니라 체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체계를 만들 시간은 이번 겨울뿐이다. 보고서의 서명자는 [[테오도르 란츠]]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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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 | 137 | === 란츠 개혁: 호송선단 체계의 확립 (1940년 12월~1941년 1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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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 | 1940년 12월 2일, 테오도르 란츠 제독이 신설된 해상교통로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3년 전 "패배주의자"로 낙인찍혀 한직으로 밀려났던 인물이 이제 해군에서 가장 많은 함정과 예산을 지휘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취임사는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전투에서 이기는 법을 배우러 모인 것이 아닙니다. 지지 않고 버티는 법을 배우러 모인 것입니다. 이 전쟁의 승패는 격침한 적함의 수가 아니라, 도착한 상선의 수로 계산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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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 | 란츠가 취임 첫 달에 밀어붙인 조치는 세 가지였다. 첫째, 속력 13노트 이상의 쾌속선을 제외한 모든 상선의 독립 항행 전면 금지. 둘째, 호송선단의 표준화. 그때까지 항구와 선사 사정에 따라 임의로 편성되던 선단을 규격화된 항로와 고정된 출발 주기, 통일된 신호 체계와 대형 교범 아래 재편했고, 호위함들도 그때그때 긁어모으는 방식에서 벗어나 함장들이 서로의 습관까지 아는 상설 호위전대 단위로 묶었다. 셋째, 가장 논쟁적이었던 상선 건조·수리 능력의 국가 통제 편입. 조선소의 선대 배정과 자재 배급, 심지어 건조할 선형의 결정권까지 사령부가 가져가는, 사실상의 해운·조선업 전시 국유화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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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 | 반발은 예상대로 격렬했다. 선사들은 선단 대기로 인한 운항 손실을 들어 소송을 예고했고, 조선업계는 "군인이 조선소를 경영하겠다는 발상"이라며 로비전에 나섰으며, 해군 내부에서조차 주력 함대의 구축함을 호위전대로 차출하는 데 대한 항명성 반발이 터져 나왔다. 12월 말 의회 청문회는 이 갈등의 정점이었다. 선단 체계가 오히려 수송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의원의 추궁에 란츠는 준비해 온 도표 한 장을 들어 보였다. 독립 항행선과 선단 소속선의 생존율 비교였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느리게 도착하는 배와 도착하지 못하는 배 중에서 고르라면, 저는 느린 배를 고르겠습니다. 배는 다시 만들 수 있지만 바닷길은 한번 끊기면 되찾을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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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 | 개혁의 실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령부가 가장 먼저 만든 것은 함정이 아니라 상황실이었다. 랜드 내해와 대서양 전역의 모든 선단과 호위전대, 그리고 보고된 적함 위치를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거대한 도상 지도가 설치되었고, 상선 선장 출신 예비역과 여성 통신 요원 수백 명이 이 '바다의 장부'를 24시간 갱신했다. 항로 결정은 감이 아니라 통계의 영역이 되었다. 습격 보고의 분포, 계절별 기상, 적함의 항속거리 추정치가 겹쳐진 위험도 지도 위에서 선단 항로가 매주 다시 그려졌다. 훗날 한 참모는 이 상황실을 두고 "란츠 개혁의 본질은 호위함 몇 척이 아니라, 바다 전체를 하나의 장부로 만든 것"이라고 요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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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 | 조선 부문의 성과는 더 극적이었다. 사령부는 상선 선형을 표준 화물선 단 두 종으로 통일하고, 곡선 강판을 최소화한 단순 설계와 블록 공법, 용접 공정의 전면 도입을 강행했다. 조선업계가 "떠다니는 깡통"이라 조롱하던 이 표준선의 첫 배는 착공에서 진수까지 150일이 걸렸으나, 반년 뒤에는 70일로, 전투 말기에는 한 달 남짓으로 단축된다. 수리 부문에서도 전국 도크의 통합 배정제가 시행되어, 손상함이 수리 순번을 기다리며 항구에 묶여 있는 평균 기간이 3분의 1로 줄었다. 격침되는 속도보다 만들고 고치는 속도가 빨라지는 순간 통상파괴전은 산수에서 패배한다는 것, 이것이 란츠 개혁의 최종 병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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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 | 물론 1941년 1월의 시점에서 이 모든 것은 아직 설계도에 가까웠다. 상설 호위전대는 편성표만 존재하는 부대가 태반이었고, 표준선 1번함은 아직 선대 위에 있었으며, 상황실의 위험도 지도는 데이터 부족으로 절반이 공백이었다. 개혁이 열매를 맺으려면 최소한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독일 해군은 그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상황실의 지도가 채 완성되기도 전인 1월 하순, 도상에 표시된 적 없는 두 개의 고속 항적이 북부 초계망의 공백을 뚫고 랜드 내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귄터 뤼첸스]]의 함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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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 | 149 | ===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 (1941년 1월~3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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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 | 150 | ===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 (1941년 5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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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 | 151 | === 사흘간의 추격전 (1941년 5월 24일~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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